가을 축제의 밤
w. 바트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려는 시간, 머리를 올려 묶은 아이가 담 앞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길을 지나는 사람이 건물 뒤로 사라지자 날쌔게 담에 오르더니 가벼운 몸짓으로 땅을 디뎠다. 갓을 고쳐 쓰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얼굴이 반짝였다.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 흥분을 담은 표정으로 늦은 시간에도 밝은 빛을 내는 거리로 향했다.
활기찬 거리에 들어선 니시노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장신구였다. 반짝거리는 장신구에 현혹된 니시노야는 주섬주섬 그동안 모은 용돈을 담은 주머니를 꺼냈다. 어머니한테 줄 어여쁜 노리개, 아버지한테 줄 멋진 주머니, 함께 지내는 아주머니한테 줄 신기한 모양의 비녀까지.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고르고 값을 치른 니시노야는 뿌듯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 곳곳에는 어린아이의 눈을 휘어잡을만한 먹거리와 장난감이 가득했고 그 유혹을 뿌리치기엔 니시노야도 아직은 아이였다. 소복이 쌓인 얼음 위로 형형색색의 꿀물을 뿌린 간식은 흔히 볼 수 없었기에 니시노야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차가운 간식이 담긴 그릇을 받아 든 니시노야는 주머니에 담긴 동전을 주인장에게 모두 내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빠져나와 공터 한쪽에 놓여있는 바위 위에 앉아, 멀리 있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얼음 가루를 빤히 쳐다보는 니시노야의 눈은 얼음보다 더욱 빛이 났다. 달콤한 얼음을 함께 준 작은 나무 숟가락으로 높이 쌓아 크게 입에 넣기를 한참, 니시노야는 저보다 어린아이들이 거리 한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식을 먹으며 천천히 아이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니시노야의 어깨를 작지 않은 손이 조심스레 두어 번 두드렸다. 의아함을 가득 담고 뒤를 돌아보니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낮게 묶은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이거. 그 간식 값보다 더 내고 왔대.”
“응. 고마워... 요.”
건네주는 돈을 받은 니시노야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천천히 살폈다. 저와는 다르게 큰 키와 다부진 몸. 어른처럼 보였지만 늙었다기보다는 성숙한 느낌이었다. 어색하게 뒤따라오는 존댓말에 눈을 살짝 접으며 웃는 아사히에 니시노야는 돌아가려는 아사히의 소매를 홀린 듯 잡았다. 이번에는 아사히가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보자 니시노야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행동과 눈빛을 보호자를 잃은 아이가 친절한 이에게 의지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아사히는 다시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모님을 놓친 것이야? 같이 찾아줄까?”
“아니요. 나 혼자 왔는데.”
“혼자?”
“응. 내게 어른이라고 다 컸다고 하였어. 그러니 혼자 외출해도 괜찮아요.”
많게 봐도 열셋을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의 말에 아사히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고 그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니시노야가 미간을 좁히며 걸음을 옮겼다. 앞에 있던 작은 아이가 갑작스레 걸음을 옮기자 아사히도 놀라 그를 따라 걸었다. 혼자 왔다고는 하지만 아이를 홀로 두고 돌아가자니 제 성격상 분명 잠도 들지 못하고 마음을 쓸 것이기에.
“그럼 나와 함께 다니지 않을래? 혼자 노는 것보다 즐거울 거야.”
“... 그래.”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맞춰 걷는 아사히를 흘긋 쳐다본 니시노야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슬쩍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의 새초롬한 표정과 조금 부풀어 오른 볼이 귀엽다고 생각한 것을 아사히는 의식하지 못했다. 체격이 차이 나는 만큼 한 걸음의 차이도 꽤 날 터인데 아사히는 니시노야가 걷는 속도를 맞추기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여러 가지 상품을 늘어놓은 가게에 유독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 어깨 너머로 살펴보니 두 명의 아이가 필사적으로 떨어지는 제기를 차올리고 있었다. 그 둘을 두르고 선 사람들이 응원인지 방해인지 모를 환호를 끊임없이 질렀고 한 아이의 제기가 높이 떠오르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승패가 정해지고 나니 축하의 환호와 위로의 탄식이 곳곳에서 큰 소리로 들려왔다. 가게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신기록이라는 말과 함께 승자가 고른 상품을 건네주는 모습까지 본 니시노야가 사람을 헤치고 잔뜩 기분이 좋아져 있는 아이 옆으로 가서 섰다.
“갖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어떻게 참여하는 것입니까?”
“참가비는 5전. 제기를 찬 횟수마다 받을 수 있는 상품이 다르지요. 도련님은 어떤 상품을 원하는고?”
“저 비녀가 마음에 드는군.”
“이야~ 꼬마 도련님이 안목은 참 좋으시네. 근데 이걸 어째요. 그 비녀는 술시 육각(20시 30분)까지 도전한 사람 중에 제기를 가장 많이 찬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
낮잡아 보는 듯한 주인의 태도에도 니시노야는 얌전히 상대하려 했으나 업신여기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호칭은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곁에 있던 아사히가 가게 주인의 태도를 꾸짖으려 했으나 니시노야가 빨랐다.
“나를 위해 준비했다니. 내가 이 가게에 올 줄 어찌 알았소?”
웃으며 주인장의 손에 던지듯 5전을 넘긴 니시노야는 바닥에 떨어진 제기를 주워들었다. 주인의 태도 때문인지 니시노야가 한 말 때문인지 주위는 조용했지만 인파는 줄지 않았고 가게 앞은 제기를 차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여유롭던 주인의 표정도 점점 놀라움이 물들어 갔다. 일각(15분)이 지나도록 제기는 땅에 떨어질 줄을 몰랐고 500개를 꼬박 채우고 나서 니시노야는 제기를 잡아 끝을 냈다.
“그럼 술시 육각에 보지.”
주인에게 제기를 넘기며 말을 하는 니시노야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뜨는 모습까지 사람들은 쉬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쳐다봤고, 아사히는 니시노야의 엄청난 체력과 나이에 비해 능숙히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 헛웃음을 뱉었다.
고기 꼬치를 들고 축제 거리 뒤편으로 사라진 니시노야를 찾던 아사히는 나무를 붙들고 혼자 성을 내는 모습을 보고 흠칫 몸을 뒤로 물렀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대장군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분이 조금 풀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사히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눈앞에 고기 꼬치를 내밀자 여전히 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니시노야가 아사히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이름이 뭐야? 나는 아즈마네 아사히라고 해.”
“유우라고 불러.”
조금 경직된 목소리로 이름인지 별칭인지 모를 단어를 뱉는 니시노야의 모습에 아사히는 조금, 선을 느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에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멀리서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어느새 막대만 남아 바닥의 모래가 잔뜩 묻은 꼬치만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공기만 존재했다.
“몸을 움직이는 게 능숙해 보이던데. 혹 훈련받고 있는 것이니?”
“가까이 지내는 형이랑 같이 가끔 단련을 하곤 해.”
“그래? 그럼 장래에 무관 시험을 보면 좋겠다.”
“왜?”
“지금도 움직임이 훌륭한데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면 합격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니.”
“그래도 무관 시험은 못 볼걸.”
“... 그렇구나.”
그 이유를 물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던 아사히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니시노야가 몸을 일으켰다. 빛을 밝힌 거리 사이로 들어가는 아이를 따라 아사히도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등에 메고 있는 봇짐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 아사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닌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니시노야에 대해 궁금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유를 그저 평소와 다른 장소와 분위기 때문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웬 봇짐이야?”
“부모님이랑 주변 사람들 줄 선물들. 돌아가면 혼이 날 터이니 조금이라도 화를 식혀드려야지.”
“혼자 외출해도 괜찮다며?!”
“내게 다 컸다고 몇 번이고 말하길래 혼자 나와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한 거야.”
“아니, 아니 잠깐. 나이가 몇인데?!”
“4일만 지나면 15세.”
놀란 아사히가 목소리를 키우며 묻는 것에도 니시노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짐작을 훨씬 웃도는 나이에 놀란 아사히가 걷는 것도 까먹고 멍하니 서 있는 걸 눈치챈 니시노야는 두어 걸음 앞에서 뒤처진 아사히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다가온 아사히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니시노야가 미간을 찌푸리자 기분이 상한 것을 알아차린 아사히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미안해.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 앳되어 보여 그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거든.”
“너는?”
“어?”
“나를 어리게 보곤 말도 편히 하는 것이잖아. 네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면, 사과를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17세야.”
니시노야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구겨진 미간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고 하려는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가만히 서 있는 니시노야와 아사히를 지나가는 이들이 힐끔거리자 아사히가 먼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 뒤를 따르던 니시노야가 불쑥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허나,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 없던 일로 하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니시노야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곧바로 따라간 아사히가 어둑한 공터에 도착해서야 니시노야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마음을 상하게 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거북하게 느끼실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저와 조금 더 어울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린아이가 아닌 걸 아셨지 않습니까. 굳이 마음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조금 더 이야길 나눠보고 싶습니다. 아이 같아서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라 조금, 당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제가 한 말이 꼭 연심을 고백하는 것처럼 들린 아사히는 부끄러움에 열이 올랐다. 최종적으로 그 모습은 니시노야가 아사히한테서 더욱 거리를 두게 만들었지만.
자신의 말을 오해한 듯 슬금슬금 멀어지는 니시노야의 모습에 당황한 아사히는 손을 휘저으며 해명에 나섰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가 무슨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해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겠다 하는 생각을 니시노야는 했다.
“좋습니다. 술시 육각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니, 일행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긍정적인 니시노야의 대답에 아사히가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같은 웃음임에도 아까보다 훨씬 밝은 미소에 니시노야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축제가 한창인 다른 거리로 들어서니 그곳은 책방과 무기상이 즐비해 있었다. 전혀 다른 성격의 가게들이 생각보다 잘 어우러져 있는 거리는 니시노야의 흥미를 끌었다. 한쪽에 있는 가게를 모두 들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니시노야는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던 니시노야는 거리 끝자락에 자리한 무기상에서 멈췄다.
매끈하게 잘 손질된 나무에 옻칠까지 된 활은 아래쪽 활시위 고정대에 작은 장식품이 달려있었다. 매듭이 지어 있는 흑색 비단실 끝에 달려있는 동그랗게 가공된 연한 녹색의 비취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활시위도 몇 번 당겨본 니시노야가 가게를 비워둔 주인을 찾아 나섰다. 건너편에 있는 가게에서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던 주인이 자신을 찾고 있는 것 같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활이 참 훌륭하더군요. 가격이 어찌 됩니까?”
“저희 가게는 활의 평판이 참 좋습니다. 그만큼 가격도 좀 세지요. 2원 50전입니다.”
돈을 넣어 놓은 주머니를 열어 남은 금액을 세어본 니시노야는 수중에 있는 돈이 부족한 것을 확인하자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그럼에도 그 활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활을 보는 니시노야 덕분에 아사히도, 가게 주인도 섣불리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가게는 늘 열고 있으십니까?”
“아뇨, 제작도 해야 하는지라 웬만큼 물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열지 않습니다.”
“주기적으로 여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예. 매번 만들어야 하는 물건의 양도 다르고 물건마다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언제 다시 가게를 열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활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니시노야를 보며 주인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아사히도 몸을 돌려 가게를 나서는 니시노야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였다. 확연히 걸음에 힘이 빠진 니시노야의 곁에서 함께 걷는 아사히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술시 오각이 막 지났습니다. 상품을 가지러 가지 않겠습니까?”
“아,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군요.”
아사히의 말에 아까의 가게로 방향을 바꾼 니시노야의 발걸음은 여전히 힘이 빠져있었다. 천천히 옆에서 걸음을 맞춰 걷던 아사히가 아래로 처진 니시노야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급한 볼일이 생각이 나 그러는데 먼저 가 있으시겠습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그 가게에서 저를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예.”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할 법도 한데 니시노야는 정신이 온통 갖지 못한 활에 가 있는지 짧은 대답만 뱉었다. 조금 멍한 니시노야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미련 가득한 그의 표정이 더욱 마음에 걸렸기에, 아사히는 걸음 속도를 높였다.
술시 육각이 가까웠음에도 500번이나 제기를 찬 어린 도령이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아, 대회를 연 가게 주인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일찍이 집에 들어가려던 계획이 생각보다 늦어져 초조한지 육각을 넘기자마자 늘어놓았던 상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게가 반쯤 정리가 되었을 즈음에 멀리서 나타난 니시노야를 바로 알아본 가게 주인이 목소리를 높여 반겼다.
“도령! 왜 이리 늦으셨소!! 도령의 기록을 깬 자는 나타나지 않았단 말이오.”
“그런가.”
“그렇다니까! 자, 이걸 원했던 것이 맞지? 크~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참 잘 만들어진 비녀군. 특히 이 도자기 장식이 일품입죠. 하나하나 보면 수수해 보여도 머리에 꽂으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게 참 영롱하다고.”
원래 성격이 그러한 것인지 변함없이 가볍고 약간은 거만한 태도로 손에 쥐여주는 비녀를 받아든 니시노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빠르게 정리되는 가게 옆에서 아사히를 기다리는 니시노야는 거리의 빛에 자기를 비춰보았다. 노오란 등불의 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던 자기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아사히가 곁에 와서 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방금 막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비녀군요. 몸체의 선과 색이 수수한 장식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아사히를 바라보던 니시노야는 비녀 몸체의 색과 아사히의 머리카락 색이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비녀를 꽂은 아사히를 잠시 상상한 니시노야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감상하듯 세심히 살피며 웃는 아사히의 손에 비녀를 넘겨주자 따듯한 갈색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선물입니다. 비록 시작은 오해 때문이었지만, 오늘 저와 함께 있어 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요.”
예상치 못한 선물이 손에 쥐어진 것에 당황했는지 아사히는 니시노야와 비녀에 번갈아가며 시선을 주었다.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밀어 올린 니시노야와 눈이 마주친 아사히가 긴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비녀를 꽂아 동그랗게 말았다. 비녀를 꽂는 모습에 더더욱 표정이 밝아진 니시노야를 향해 아사히가 허리를 숙이자 자기 장식이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내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아사히의 얼굴에 놀란 니시노야의 표정이 굳자 이번에는 아사히가 입술을 밀어 올렸다.
“어떤가요? 잘 어울립니까?”
“아. 예, 예... 잘 어울립니다.”
“감사합니다.”
굳은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답을 한 니시노야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축제 거리의 끝으로 향하는 걸음을 본 아사히는 혹시나 돌아가려나 싶어 급하게 니시노야를 잡았다.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뜬 채 돌아보는 모습이 참 어여쁘다 아사히는 생각했다.
“실은 저도 준비한 게 있습니다.”
“예?”
“저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니시노야가 미처 답을 하기도 전에 아사히는 작은 손을 잡아끌었다. 북적이는 거리를 벗어나 행인이 적은 골목에 들어선 아사히가 등에 메고 있던 꾸러미를 내밀었다. 작지 않은 꾸러미를 받아든 니시노야는 손에 전해지는 무게와 형태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꾸러미를 풀어보니 아까 아쉽게 두고 떠나야 했던 활이 자리해 있었다. 원하는 물건을 손에 얻은 기쁨도 잠시, 순식간에 니시노야는 얼굴에 미심쩍은 걱정이 드러났다.
“어찌 이걸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 만난 이에게 주기에는 귀하고 값비싼 물건 아닙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미처 답을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아사히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사히에게 니시노야는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비취가 달린 활을 내밀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런 물건을 덥석 받을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 아닙니다.”
“그, 선물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
“며칠 후에 생일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생일 선물입니다.”
“예?”
“생일 선물이니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가듯 이야기한 생일을 핑계로 댈 줄은 몰랐던 니시노야는 선뜻 받아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니시노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여도 여전한 태도에 아사히는 지금껏 지었던 표정 중 가장 밝은 미소를 내보였다.
“축하하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니 받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는 니시노야의 품에 활을 밀어 넣은 아사히는 조금,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활을 받는 것이 영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면 저와 만남을 가져 주시겠습니까?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종종 사냥도 나가면서요.”
“예?”
“벗이 되어 달라는 말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니시노야는 당황했지만 그 제안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제안에 대해 생각하는지 입을 우물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아사히는 차분히 답을 기다렸다. 동행을 허락했을 때처럼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니시노야가 이번에는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거리를 밝히던 불도 하나 둘 꺼지고,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이 더욱 선명히 보이자 아사히는 집으로 향하는 니시노야의 뒤를 따랐다. 한사코 거절을 했음에도 아사히는 강경했고, 니시노야는 집을 보고 놀라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며 약속을 받아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던 아사히는 니시노야의 걸음이 궁 쪽으로 향할 때마다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고 동궁의 정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뒤를 돌아본 니시노야는 아사히를 잡아당겼다.
“벗이 되자는 말, 이제 와 무를 생각은 아니지요?”
“송구합니다, 저하. 제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새파랗게 질린 아사히가 몸을 뒤로 물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 행동에 니시노야는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펴고 입꼬리만 길게 끌어 올렸다.
“송구는 무슨. 그런 일 모두 잊고 벗이 된 것 아닙니까.”
“하오나..”
“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첫 번째 벗을 고작 신분 따위로 잃고 싶지 않아요.”
니시노야의 말에 아사히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제가 먼저 벗이 되어 달라 요청한 것이고 그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답이 없는 아사히를 수긍한 것으로 받아들인 니시노야는 이번에는 눈까지 접어 웃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니시노야 유우입니다. 아즈마네 가의 아사히라고 하였지요. 연회에 그대를 초대한다는 서신이 조만간 갈 것입니다. 스승님께는 따로 말씀을 드릴 것이고요.”
아사히가 고개를 끄덕이자 니시노야는 몸을 돌렸다. 소란스러운 문을 향해 사람을 부르자 문을 향해 다가오는 여러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저하. 추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래도 지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니시노야가 몸을 돌리자 아사히가 미소를 지었다. 말을 마친 아사히가 보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고 그의 몸짓과 말에 담긴 의미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니시노야도 밝게 웃음을 지었다.
“탄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부디 좋은 밤 되십시오.”

